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2차 괌 전투 (문단 편집) == 배경 == 1941년 12월 [[제1차 괌 전투]] 이후 괌은 다이큐도(大弓島, 대궁도)로 개명당한 채 일본의 [[일본령 괌|통치]]하에 놓이고 있었다. 1944년, [[대본영]]은 괌을 포함한 마리아나 제도 전역을 절대국방권으로 선포하고 해당 지역에 대한 절대사수를 준비하고 있었다. 일본으로선 괌과 [[북마리아나 제도]]가 무너지면 [[필리핀]]은 물론 일본 본토까지 그대로 미군의 진격로가 활짝 열린다는 것을 잘 알았기에 어떻게든 사수하고자 했고, 또 [[중국]]에서 [[규슈]]로 날아오는 [[B-29|미국의 신형 폭격기]]가 마리아나 제도에 배치될 경우, 열도 전역 특히 수도 [[도쿄]]가 그 사정권에 들어간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었다. 미국 역시 같은 이유에서 마리아나 제도를 어떻게든 공략하고자 했다. 필리핀을 탈환하자는 맥아더 루트나, 대만을 거쳐 중국 본토로 진공하자는 해군 루트나, 극소수 일본 본토 직접공격론이나 한결같이 마리아나 제도를 요구하고 있었다. 마리아나 제도의 여러 섬들은 서태평양상에서 군사작전을 위한 최적의 위치에 있었고, 섬의 규모도 대규모 기지 건설에 적합하였으며 B-29가 일본 본토를 폭격하기 위해서라도 필수적인 곳이었다. 마리아나 제도 중에서도 괌은 특별한 정치적 상징성이 있었다. 괌은 미국이 잃어버린 영토 즉 실지였다. 1943년의 [[알류샨 열도 전역]]에서 키스가, 애투 섬을 탈환한 이후 미군은 추가적으로 개전 이전의 영토를 되찾지 못하고 있었다. 괌은 미군에게 있어 전쟁 이전의 영토를 되찾는다는 매우 귀중한 의미가 있는 곳이었다. 마리아나 제도 전역에 대한 공략은 Operation Forager로 명명되었으며, 제일 먼저 [[사이판 전투]]가 발발하였다. 가라판은 일본령 [[남양군도]]에서 2번째로 큰 도시였고[* 가장 큰 곳이자 수도는 [[팔라우]]의 코로르인데 팔라우 제도 역시 9월에 미군의 공격을 받는다.] 마리아나 제도 가운데에 위치해 있어서 제일 먼저 공격받은 것이다. 그리고 미군은 7월 21일 괌 탈환전을 개시한다.[* 참고로 티니언 섬 상륙은 3일 뒤인 7월 24일, [[펠렐리우 전투]]는 9월 15일, [[앙가우르 전투]]는 9월 17일에 각각 진행되었다.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동시다발적으로 공격한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